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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딸이 생의 주인이 되도록 북돋아 주신
서남병원 노창석 박사님 간호사님들, 고맙습니다”
 
양천신문 기사입력  2023/02/13 [10:45]
▲ 서울특별시 서남병원 누리집 ‘칭찬합니다’ 게시판에 있는 김종욱 씨의 글 캡처 화면.     © 양천신문

 

따뜻한 말과 행동 말기환자 가족에 큰 위로

많은 병원 다녀봤지만 이런 친절은 처음

 

위로는 슬픔의 무게를 덜어준다. 따뜻한 말과 배려 담긴 행동은 어둠에 잠긴 누군가에게 한 줄기 굳건한 빛으로 다가온다. 지난 21일 서울특별시 서남병원 누리집 칭찬합니다게시판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글쓴이 김종욱 씨는 서남병원 의료진이 폐암 말기로 투병 중인 딸과 보호자인 저의 처에게 가족 같은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격려를 해주시며 성심을 다해 치료해 주셨다.”라며 비록 딸은 하늘나라 별이 되었지만 노창석 박사님과 52병동 간호사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힘을 얻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양천신문은 지난 6일 김 씨의 부인 박영애 씨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서남병원 의료진의 미담(美談)과 지금은 고인이 된 딸 김희숙(44) 씨와 그의 가족의 투병기에 대해 들었다.

 

일본의 한 기업에서 근무하던 희숙 씨는 지난해 5월 말 한국의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아파서였다. 코로나-19에 감염돼 몸이 좋지 않았는데 원인 모를 통증이 점점 심해졌던 그는 아무래도 한국의 큰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주위의 권유로 3개월의 휴가를 얻어 귀국했다. 대학병원 검사 결과 폐암이었고, 손을 쓰기 힘든 지경이었다.

 

희숙 씨는 여행을 다니며 생을 마감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울면서 한 번만 치료해보자, 그래도 안 되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만류했다. 몇 달간 고통스러운 항암치료와 신약 치료가 이어졌다. 그러나 희숙 씨의 몸은 갈수록 말랐고, 의료진의 말에선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예감했는지, 일본 회사의 지인을 통해 10년 넘었던 일본 생활을 정리했다. 부모는 그런 줄도 몰랐다. 12월 말 일본에서 온 택배를 받아들고서야 알았다.

 

암세포는 점점 희숙 씨의 몸을 장악하며 극심한 통증을 안겨줬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고통으로 절규하며 진통제를 맞아야 했다. 죽음 앞에 의연하게 서 있으려 했지만, 등을 돌려 생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어머니 박영애 씨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의료진은 호스피스 시설 입소를 권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마음은 알지만, 생의 마지막 길, 환자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의미 있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벼랑 끝에 선 것 같았다.

 

지난해 1229일 희숙 씨는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서남병원에 입원, 일반 병동인 52병동에서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서남병원은 말기환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도 운영했다. 희숙 씨의 고통은 점점 커졌고, 점점 빨리 찾아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딸을 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졌다.

 

딸과 엄마는 매 순간, 같이 아팠다. 그런데 그 아픔에 의료진들이 함께 해주었다. 물론 그 전에 다니던 병원들의 의료진들도 열심히 해주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어머니는 늘 고립된 느낌이었다. 나만 애가 타는 것 같았고, 우리의 고통 앞에 다들 무표정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서남병원 의료진은 달랐다. 밤이고, 새벽이고 딸이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간호사들은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달려와 주었다.

 

고통의 크기는 점점 커졌고, 주기는 더 빨라졌다. 고통이 극에 달해 딸이 주삿바늘을 빼버리고 산소 호흡기 호스를 입으로 물어뜯고 분노에 차 욕을 하는 일도 생겼다. 어머니는 어찌할 줄 몰랐다. 딸의 담당 의사인 노창석 박사는 딸의 행동에 상처받지 말라고 다독여주었다. 그런 상황은 앞으로 더 자주 올 것이며 그 정도는 심한 것도 아니라며 위로해 주었다. 회진할 때 딸이 집에 가고 싶다.”라고 하면 노 박사는 조금 더 안 아파지면 그때 집에 보내줄게요.”라며 항상 가능성을 열어두는 말로 딸을 안심시켜 주었다.

 

간호사들도 모두 친절했다. 딸 아이가 고통 속에 뱉은 날카로운 말에도 일일이 다 대꾸해주었다. “아프기 전에 진통제를 놔주지, 왜 아플 때 놔주냐.”라는 딸의 말에 간호사는 아프게 될 걸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해요.”라고 답해주었다. 딸이 진통제를 찾다가 스르륵 잠이 들면 병실에 왔다가 진통제를 놓지 않고 다시 살짝 나가고, 또 깨서 아프다고 하면 다시 달려와서 진통제를 주었다. 진통제를 맞으면 한동안 정신이 없어지니까, 조금이라도 깨어 있는 시간을 더 만들어주기 위한 배려였다.

 

박영애 씨가 한밤에 슬픔에 잠겨 혼자 울고 있을 때 한 간호사는 가만히 등을 두들겨 주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준 건 간호사들이 늘 딸 아이의 이름을 크고 또렷하고 상냥하게 불러줄 때였다. “김희숙 씨, 식사하세요.”, “김희숙 씨 오늘은 괜찮아요?” 그럴 때마다 딸은 눈을 크게 뜨고 .”하고 대답했다. 마지막까지 그렇게 딸을 존중해주는 모습이 너무 감사하고 감사했다.

 

지난 설 명절이었던 123일 새벽, 희숙 씨의 맥박이 점점 떨어졌다. 달려온 당직 의료진은 박 씨에게 가족을 부르라고 했다. 그리고 의식 없이 누워 있는 희숙 씨의 귀에 대고 해주고 싶은 말을 다 해주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들과 아버지가 올 때까지 쉼 없이 희숙 씨에 귀에 말을 해주었다. 희숙 씨는 정말 어머니 말을 듣는지 잠깐씩 맥박 수가 올라갔다. 그리고, 편안한 얼굴로 깊게 잠들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나라의 별이 되었다.

 

딸은 여행 다니고, 전시회 다니는 삶을 꿈꿨어요. 일본어도 영어도 중국어도 잘 하는 너무 똑똑한 아이였죠. 그래서 제가 너는 해외에서 살라고 부추겼어요. 시집도 안 보내고. 딸은 제 자랑이었고, 딸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꼈어요. 그런 딸이 점점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저도 하나씩 무너져갔죠. 그런데 그런 절망 속에 처한 저에게 서남병원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큰 위로가 되었어요. 정말 다른 병원에선 느끼지 못한 위로를 많이 느꼈어요. 노창석 박사님은 딸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자 이후의 예견되는 상황을 때마다 미리 얘기해주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받을 충격을 완화해 주셨어요. 딸이 숨을 몰아쉬는 상태가 되자 노 박사님은 이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며 저희에게 언질을 주시고, 딸 아이에겐 모든 사람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지금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말, 모두 다 하세요.’라며 말씀해 주셨어요. 딸이 떠났을 때 진심으로 애통해하는 노창석 박사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박영애 씨는 끝까지 딸이 생의 주인이 되도록 북돋아 주었던 서남병원 의료진 덕분에 고통 가운데서도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최고의 딸희숙 씨를 최고의 딸로 보낼 수 있었다.

유승용 기자

 

ysyc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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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3/02/13 [10:45]  최종편집: ⓒ 양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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