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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의 황혼 단상]‘빨리빨리’ 말고 ‘두루두루’ 문화로
 
양천신문 기사입력  2019/04/15 [12:28]

<이영호의 황혼 단상>

 

이영호 작가(창작산맥 등단)

전 강서고, 영도중 교감

 

화병(火病)은 현대의학의 공식적인 진단명은 아니라고 한다. 오랫동안 화날 일이 있어도 화풀이를 못했을 때 속에서 응어리가 돼 여러 가지 신체 증상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울화병(鬱火病)의 줄임말로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의 한 형태다. 화병을 외국 의학계에서는 우울증과 신체형 장애, 범 불안 장애 등으로 부르고 있다.



화병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라고 한다. 미국 정신과협회에서는 지난 1996년 한국인에게 많이 나타나는 문화 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등록했는데 한국어 유래의 국제표준어로 이 질환을 ‘Hwa-byeong’이라고 불렀다. 한국문화에서 파생된 특이한 정서와 한국인의 한(恨)을 기본바탕으로 한 매우 한국적인 질환으로 본 것이다.


예전에는 불만이 있어도 꾹꾹 참은 한국의 중년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었지만 최근에는 나이 성별 관계없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느끼는 심리적, 신체적 긴장 상태를 스트레스라고 하는데 화병은 쌓이는 스트레스와 화(火)가 풀리지 않는다는 불의 성질을 가진 병으로 보고되고 있다.


한국인의 화병은 ‘빨리빨리 문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정이든 사회든 우리의 행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침착한 처리보다는 속도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빨리 나오기를 원하고 식사 시간도 엄청나게 빠르다.


운전할 때도 규정 속도를 잘 지키지 않고 빨리 달린다거나 자기 앞에서 조금만 더디게 운전하는 차를 보면 답답해하며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리고 위협적으로 앞질러나가는 운전자들도 많다. 대형 마트 등에서 아이들이 조금만 뒤처지거나 한 눈을 팔면 부모들은 대개 “뭐해, 빨리 안 오고.”하며 짜증을 부린다.


‘빨리빨리 문화’가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1960년대 초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새마을 운동을 비롯한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 국민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일했고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가난에서 벗어나게 됐다. 지금은 세계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빠른 초고속 인터넷을 자랑하며 IT 강국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런데 부작용도 적지 않다. 빠른 성장에만 급급하다보니 다 함께 행복하고 잘 사는 복지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부족했다.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지고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사회가 아니라 삭막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 나 자신에게 화를 참지 못해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화의 원인은 대개 내가 타인보다 더 빨리 가고 있는지, 혹 느리게 가고 있지는 않는지 자꾸 비교해 보는 데에서 시작된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다. 화 한 번 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화를 풀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제 무조건 물질적 성장을 좇으며 ‘빨리빨리’를 부르짖으며 나와 타인의 속도를 자꾸만 비교하며 누가 더 빠른지 셈하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 느림의 미학도 추구하며 조금 늦더라도 모든 이들이 두루두루 잘 살고 평화로운 복지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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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4/15 [12:28]  최종편집: ⓒ 양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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